피아노
어둠이 걷히고 아침이 되면, 모든 소리가 깨어나 꿈결 같은 기분이 순식간에 사라진다. 소리 없는 평온한 세상은 어떤 것일지 상상해보지만, 그리 유쾌하지 않다.
내가 바라는 건 조용한 세상이긴 하지만, 소리가 완전히 걷힌 침묵의 세상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피아노가 생기면서 나는 처음으로 듣고 싶은 소리에만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
건반 하나하나에서 나오는 소리는 강약에 따라 건반에 머무는 시간에 따라 각기 다른 이야기를 펼쳤다.
악보는 필요 없었다. 들었던 소리의 느낌을 그대로 피아노에 실었다. 빗소리,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 나뭇잎이 떨어져 구르는 소리, 동생의 웃음소리……. 기분 좋은 파장이 쉴새 없이 만들어졌다.
피아노에 하루 종일 매달려 있으면 다른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기시감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 아줌마의 목소리는 들어본 적이 있는 것처럼 익숙했다.
“오늘 연주는 괜찮았어. 다만 한가지, 특정 소리에 너무 치우쳐져 있어. 눈을 감고 주변 모든 소리에 집중해.
듣고 싶은 소리만 듣는다면 한계에 부딪히겠지만 모든 소리에 귀 기울이게 되고, 그 소리가 네 감정을 집어 삼켜버리는 순간이 오면 너는 다른 해답을 손에 쥘 수 있을 거야.”
“아줌마한테 나오는 소리는 나쁜 느낌이 나요. 아줌마는 나쁜 사람인가요?”
“나쁜 사람이라…… 누군가에게는? 그리고 또 누군가에게는 그 반대일 수 있지. 그런 건 내가 정하면 되는 거라서 별 의미가 없단다.”
무거운 어둠
수많은 소리가 고통이 되었다.
내 피아노 소리는 사람들의 고저가 다른 불규칙한 박수 소리, 신경을 거슬리게 하는 작은 속삭임들, 연주가 끝나고 나오는 좋지 않은 파장들에 묻혀버렸다. 피아노를 치는 것이 두려워졌다.
“시작이 다른 사람들에게 평화는 낯선 단어야. 그것을 욕심내는 순간 모든 것이 틀어져 버린단다.
너는 예술가가 될까? 하지만 사람들이 순수하게 너를 인정할 수 있을까?
사람들은 네가 노력한 건 없다고 생각할 거야. 넌 처음부터 달랐으니. 네 연주는 진실되거나 감동이 없다고 얘기할 테지. 하지만 그리 불행한 건 아니야.
내가 다른 방법을 선택한 것처럼 네게도 너를 지킬 방법이 있어.”
무거운 어둠이 쉴새 없이 내 감정을 집어삼켰다. 점점 모든 소리가 또렷하게 스며들었고,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내 머릿속에는 이미 들었던 소리까지 뒤범벅되었다.
그리고 누군가의 소리를 들으면, 그 사람에 대해 알게 되었다.
걸음 걸을 때 나는 소리, 중간중간 토해내는 깊은 탄식, 잠들어 있을 때 숨소리, 그자의 하루가 평온했는지 불안했는지 무슨 꿈을 꾸는지 어떤 것에 억압을 받고 있는지.
그건 그 사람의 숨길 수 없는 진실이었지만, 한편으론 내가 듣고 싶지 않은 다른 사람의 일상이기도 했다.
눈에 보이는 평화로움은 추상적인 소리, 그 소리의 느낌들로 깨끗이 사라졌다.
오르골
저 멀리 그 아줌마가 보인다. 온 힘을 다해 힘껏 달린다. 이쯤이면 되겠지.
하지만 뒤돌아보면 아줌마는 내가 멀어진 방향을 향해 서 있다. 마치 내가 어디를 향할지 알고 있는 것처럼.
오르골을 손에 든 리첼의 파장이 이전과는 달라졌음을 알았지만, 그 아줌마에게 돌려주지 않았다. 오르골을 통해 나의 공간을 만들 수 있었다.
그곳에는 온전히 오르골 소리만 울려 퍼졌고, 다른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리첼은 내 변화를 가장 빨리 눈치챘지만, 아무 말도 해주지 않았다. 난 언제든 리첼 뒤에 숨을 수 있고, 그 애에게 의지하면 되니 달라질 건 없었다.